영화 '블레이드 러너' 포스터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SF 신기원을 연 작품이다. 2019년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영상미와 다양한 특수효과로 몽상의 미래 세계를 훌륭하게 그렸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1985)과 함께 20세기 최고 SF 영화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저주받은 걸작'에서 위대한 SF로
영화는 후대 평가와 달리, 개봉 당시 지루한 전개 및 지나치게 철학적인 주제 때문에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 관객으로부터 외면 받았다. 아울러 같은 시기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이티)'가 흥행 대박을 치며 밝은 분위기를 가진 SF 영화가 각광을 받자, 어두운 미래를 그린 '블레이드 러너'는 그대로 쪽박 신세를 지는 듯했다.
막대한 제작비 투입으로 본전도 못 건질 위기에 처해 '저주받은 걸작'이 될 뻔했던 영화는, 수년 뒤 미국 가정에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비디오로 영화를 접한 SF 마니아들에게 뒤늦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입소문은 스콧 감독이 '디렉터스 컷'(1992)과 '파이널 컷'(2007)을 차례로 내놓은 데 영향을 줬다.
'블레이드 러너'가 극장가가 아닌 2차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작품에 담긴 철학적인 주제가 대중에게 전달됐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디스토피아풍(風) 영상미 역시 작품을 '걸작' 반열에 오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
'블레이드 러너'의 성공은 이후 제작되는 '디스토피아 SF' 영화의 모티브로 이어졌다. '재패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린 80년대 일본 SF 만화계도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을 받았다. '아키라'(1988) '공각기동대'(1995) 등 당시 재패니메이션을 주름잡은 수많은 SF 명작이 '블레이드 러너'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블레이드 러너' 스틸컷
◆원작 소설과 차이점
'블레이드 러너'는 미국 작가 필립 K. 딕의 장편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기본 바탕으로 한다. 원작에서 은퇴 뒤 복직한 특수경찰 릭 데커드는 화성 식민지 '오프월드'를 탈출해 지구에 잠입한 인조인간(안드로이드)들을 퇴역(은퇴)시키다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느끼며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영화는 딕의 원작을 투영하는 기본 주제 '인간은 무엇인가, 현실은 무엇인가'를 공유한다.
스콧이 원작을 영화로 옮기면서 각색한 설정도 많다. 제목이자 데커드의 직업인 '블레이드 러너'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설에선 '현상금 사냥꾼(바운티 헌터)' 정도로 표현된다. 원작의 악당 역할인 '안드로이드'는 '레플리컨트'로 대체됐다.
특히 등장인물 설정이 많이 바뀌었다. 오프월드에 가지 못해 지구에 남은 특수인 J. R. 이지도어는 영화에서 잠시나마 프리스를 돕는 레플리컨트 인체공학 디자이너 J. F. 세바스찬으로, 안드로이드를 개발한 '로즌 사(社)' 회장 엘든 로즌은 엘든 타이렐로 이름이 변경됐다.
영화에서 데커드 주위를 멤돌며 성냥개비 인간, 의문의 종이접기 동물(닭, 유니콘)을 남겨 주인공의 정체를 인간인지 레플리컨트인지 알 수 없게 하는 동료 '블레이드 러너' 거프는, 사실 원작엔 등장하지 않는다. 데커드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스콧이 투입한 가상의 인물이다. 원작에서 데커드는 확실한 인간으로 나온다. 거프는 드니 빌뇌브가 연출을 맡은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도 특별출연하며 데커드의 과거를 주인공 K에게 들려준다.
이밖에도 영화 속 데커드는 아이란이라는 아내를 둔 원작과 달리 싱글이다. 영화 초기 설정에 따르면 데커드는 이혼한 상태다. 또, 원작에서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키려는 목적은 현상금으로 살아있는 양을 사기 위함이다. 기계로 된 복제 동물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해리 브라이언트 반장의 성화에 못 이겨 레플리컨트 퇴역 작전에 참여하며 복직한다. 목적이 돈 때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릭 데커드(왼쪽)와 레이첼 타이렐
◆영화 사상 최고의 엔딩
'블레이드 러너'는 하드보일드한 SF의 시초로 알려지며 후대 영화 사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네온사인이 밤 거리를 밝히는 어두컴컴한 미래 도시 연출도 '블레이드 러너'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뛰어난 영상미와 독특한 미쟝센으로 무장한 '블레이드 러너'지만, 영화를 더욱 유명하게 한 건 따로 있다. 엔딩 장면이다.
영화 후반부 데커드와 빌딩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마지막 레플리컨트 로이는 본래 전투용으로 개발됐다. 신체 능력이 데커드를 능가했다. 로이는 벽을 부수고 구멍을 낸 뒤 데커드의 팔목을 잡아 손가락을 부러뜨리면서 레플리컨트의 강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이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인간을 상대로 이상하리만치 느슨한 공격성을 보인다. 데커드가 도망할 시간을 주고 쇠파이프로 머리를 얻어맞는 등 약간은 엉성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투용 레플리컨트로서는 2% 부족한 모습이다.
이 배경에는 로이의 정해진 수명이 있다. 로이는 다른 레플리컨트와 마찬가지로 4년밖에 가동되지 않는다. 4년 뒤면 좋든 싫든 수명을 다한다. 그가 동료들을 이끌고 지구에 숨어든 이유도 창조주인 엘든 타이렐을 찾아가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때부터 인간과 레플리컨트 사이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단순한 기계일 뿐인 레플리컨트가 수명이 정해지지 않은 인간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즉,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을 하는 일이 가능해진 걸 의미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로이는 인간인 데커드를 죽이는 게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피해 옥상에서 옆 건물로 뛰다 난간에 매달린 데커드를 구해주고, 수명이 다하기 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정시 같은 대사를 읊는다.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난 너희 인간들이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봐 왔지.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오리온 성운의 어깨에서 불에 타는 전함들.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auser Gate.
어두운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C 빔을 보기도 했어.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이 모든 순간은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지겠지.
Time to die.
죽을 시간이야.
레플리컨트가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는 SF 그리고 영화 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로 기억될 엔딩으로 남았다. 기계가 인간과 정체성에서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영화 속 설정을, 레플리컨트가 죽을 위기에 빠진 인간을 살려주고 장렬히 전사하는 연출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인간보다 어쩌면 '더 인간적인' 레플리컨트의 마지막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연출은 없었다. 대중이 '블레이드 러너'를 걸작으로 칭송하는 데 엔딩을 첫손에 꼽는 이유다.
죽음을 앞둔 레플리컨트 리더 로이 베티
로이가 전사하면서 이대로 끝날 것 같던 영화는 거프의 재등장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스피너를 타고 빌딩 옥상에 올라온 거프는 탈진한 데커드에게 엘든 타이렐 조카 레이첼의 생사를 알 수 없게 하는 의문의 말을 남긴 채 떠난다.
It's too bad she won't live.
그녀가 죽게 돼 정말 안됐어.
But then again who does?
하지만 누군들 안 그러겠나?
이 말을 들은 데커드는 긴급히 집으로 돌아와 레이첼의 상태를 살핀다. 다행히 레이첼은 살아있었다. 레플리컨트 퇴역 임무를 마친 데커드는 레이첼과 함께 오프 월드로 떠날 채비를 하고 문밖을 나서는데, 발밑에서 유니콘 모양의 종이접기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거프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유니콘은 거프가 남기고 갔으며 데커드가 꾼 꿈에 나타난 환상의 동물이었다. 거프가 자기의 꿈 내용을 알고서 일부러 남기고 간 것인지 의문을 품던 찰나 데커드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고 반젤리스의 웅장한 엔딩 OST와 함께 영화는 대단원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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